입대하던날과 전역하던날의 기억

입대전날 아침 아홉시(09:00 AM)
아,이제 내일이구나.
내일 14시까지 의정부 306보충대라 그랬으니,지하철타고 의정부에 내려서 택시나 버스를 타게 되면 2시간이면 충분히 가게될 듯 하다.
결국 올것이 오고야 말았다.
‘운전면허증은 들고가야 되나? 시계는 차고 가야 되나? 혹시 잃어버리면 어쩌지?’
이런저런 고민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낮 열두시(12:00 PM)
동네 블루클럽에서 머리를 깎았다.군대간다 그러니까 알아서 깎아주었다.
갑자기 미용사 아가씨가 미치도록 부러워졌다.내일도 그냥 오늘과 같은 평범한 생활을 할테니까.
그리고 군대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평생 느낄 기회도,느껴야 할 이유도 없을 테니까.
내일 또 누군가가 군대간다고 머리 깎으러 오게 된다면
‘어제도 한명 오더니 오늘도 또 오네.’라고 생각하며,
그냥 늘 하듯이 싹둑싹둑 잘라주겠지.

오후 세시(03:00 PM)
이제 24시간도 남지 않았다.
만날 사람도 모두 만났고,머리도 깎았고,준비할 것들은 사실상 끝났다.
무엇을 할까?
방청소를 마저 했으면 좋겠지만,이제 시간이 없다.
그리고 사실 청소같은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이제 사용할 방도 아닌데…

오후 여섯시(06:00 PM)
주위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연락을 했다.
문자를 보내기도 했고,메신저로 대화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는 세상이 부러웠다.

2년동안 내방의 서버 컴퓨터가 잘 버텨줄지 걱정이다.
이것저것 안전대책을 마련하긴 했건만…불안한건 사실이었다.
이제는 그저 2년동안 무사히 버텨주길 바랄 뿐.
군대갈때 자기방의 컴퓨터를 켜두고 가는 놈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저녁 아홉시(09:00 PM)
약간의 술을 마셨다.
마시지 않으면 잠을 못잘 것 같고,너무 많이 마시면 내일 속이 쓰릴것 같아서,
아주 조심스럽게 양을 조절해 가면서 마셨다.
젠장,술마시는 것까지 이렇게 조심스럽다니……
그냥 아무 생각도 안난다.답답함으로 치면 수능전날의 3배정도 되는 것 같았다.
내가 왜 이 땅에 태어나서 이런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지?
갑자기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밖에 나가 담배를 피웠다.
마지막 밤이었다.
내일 밤에는 나는 여기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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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대 당일 아침 아홉시(09:00 AM)
밤새 뒤척거렸던 탓에,다소 늦게 일어났다.
일단 목욕부터 갔다.늦어도 12시에는 집을 나서야 했으므로,서둘러야 했다.
바깥은 화창한 오월의 봄날이었다.그리고 오월답지 않게 다소 무더웠다.
반팔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눈에 띄였다.벌써 여름 냄새가 나는 듯 하였다.
사람들과 자동차들은 오월의 화창함에 장단을 맞추기라도 하듯 활기차게 움직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낮 열두시(12:00 PM)
시간이 약간 빠듯한 듯 해서 일단 점심은 먹지 않고 곧바로 출발하였다.
지나가다 편의점에서 김밥으로 대충 때울 요량이었다.
집을 나서며 뒤들 돌아보니 대문이 보였다.
‘안녕,잘있거라’
나는 예전에는 해보지 않았던,’대문에 작별인사’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하였다.

의정부역에 도착하니 친절하게도 306보충대로 가는 푯말을 여기저기 설치해 놓았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여기저기서 물건들을 팔고,택시들이 줄지어 서있고,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는 것이,마치 소란스러운 입실직전의 수능시험장이랑 분위기가 비슷했다.
약간의 시간적 여유가 있었으므로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오후 한시(01:00 PM)
이제 한시간 남았다.
택시를 타기로 했으나,의외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았다.
마음이 초조하다.

오후 한시 오십오분(01:55 PM)
다행이 늦지는 않았다.
넓은 운동장의 한 가운데에는 짧은 머리의 남자들이 이미 줄을 맞춰서 서 있었고,단상위의 누군가가 마이크로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운동장의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시끌벅적하였고,그들은 이제 먼길을 떠나는 아들 또는 애인,친구를 위하여 배웅을 하러 와있는 것이다.
나역시 그 짧은 머리의 대열속에 줄을 섰다.그리고 잠시후 그 줄은 어딘가로 이동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순간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했고,살짝 뒤돌아 보니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눈물이 울컥할 것 같았다.

 

그렇게 군생활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747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전역전날 공구시(09:00)
토요일이었지만 토요휴무제 덕분에 07시에 기상해서,대충 밥먹고,계속 TV만 봤다.
09시부터 막사앞에 집합해서 체육활동 해야 하는데,장구류 정비등을 이유로 그냥 내무실에 남아 전투복 다림질을 했다.

십이시(12:00)
소대 회식이 있었다.소대에 전역을 앞둔 사람이 몇명 있어,같이 송별회겸 하는 것이었다.
맥주한캔 마시고,닭도 먹고,과자 등등을 먹었다.
군대에서는 음주에 관해서 지휘관 허락하에 정해진 양만 마실수 있다는 규정이 있어,항상 술이 모자란다.
내일부터는 마음껏 마셔줘야겠다.
음주후 취침을 해야 하므로,전부 내무실에 취침모드로 들어갔다.

십오시(15:00)
내일 민간인이 우리부대로 견학을 온다고 해서,취사장 청소를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음주후라 일병,이등병은 그냥 재우고 상병,병장만 깨워서 청소하기로 했다.
내일 전역하는데 청소안한다고 뭐라 그럴사람은 없지만,특별히 할것도 없고,심심하기도 해서,청소하는것을 도와주었다.

십팔시(18:00)
저녁식사를 했다.
전투복도 다림질 했고,중대장님께 신고도 했고,전투화도 닦았고…대충 준비는 끝난 것 같다.
특별히 할 것도 없고,KMTV로 뮤직비디오를 보다가 재미 없어서,그냥 기타를 쳤다.

이십일시 오십분(21:50)
점호가 끝나고,이십이시(22:00)까지 미비된 동작을 완료하고 취침에 들어가랜다.기상후 30분,기상전30분 유동병력 없댄다.
복도 끝 베란다로 가서 담배를 피웠다.
‘마지막 일석점호…그리고 군생활 마지막날 밤’
저 멀리 도시의 불빛이 보였다.
‘아’하고 감탄사가 나왔다.
이제 나도 저 불빛속의 일원이 되어 살아가겠구나.
그날이 이렇게 다가올 줄이야…
하지만 그렇게 갈망하던 기다림의 시간이 이렇게 끝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허전하였다.
입대전날 답답했으면,전역전날 그만큼 후련해야 하건만…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남의 설레임보다 헤어짐의 아쉬움이 큰 것 처럼…

이십이시(22:00) ~
모포를 깔고,포단을 덮고 누웠으나,잠이 오지 않았다.
TV를 틀었으나,재미가 없었다.
계속 누워서 뒤척거렸다.시계를 보니 자정이 지났다.2시간동안 잠을 못잤던 것이다.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
‘입대하기 전날도 이렇게 잠을 이루지 못했지…’
2년전의 일이지만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오늘이 마지막 밤이다.나는 내일 여기에 없다.

이병,일병,상병,병장,예비역 전투모
[▲이등병,일등병,상병,병장…그리고 꿈의 개구리마크.너무나 까마득해 보였던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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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 당일 공칠시(07:00)
기상과 동시에 잽싸게 취사장으로 갔다.
오늘 아침 메뉴는 햄버거라서 여러개 싸들고 집에 갈 생각이었다.
건빵과 초코파이는 지겹지만,이 햄버거만큼은 이렇게 집에가는 날에도 맛있어서 몇개 더 싸들고 갈 정도다.

공팔시(08:00)
일요일이었지만,어제 중대장님 근무이셨고,아직 근무교대할 시간은 아니라,아마 지휘통제실에 계실 듯 하였다.
지통실에 전화했더니 당직사령님 자리를 비우셨다는 말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인사드리고 갈 생각이었지만,안계시니 어쩔수 없었다.
내무실에서 들고 갈 짐들을 챙기고,총을 반납하러 행정반에 갔더니,행정보급관님이 와 계셨다.
휴일에 전투복 차림으로 무슨일이신가 싶었는데,오늘 민간인 방문 때문에 그런 듯 하였다.
나를 보더니 “너 아직 안갔냐?”라고 한마디 하셨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곧장 신고하고,잽싸게 나왔다.
옆에서 구경하던 당직부사관이 노골적으로 부러운 표정을 보였다.
어깨한번 토닥거려 주고 행정반,그리고 중대를 나왔다.

전역모를 쓰고 전역백을 메고,연병장을 걸어나가는데,
체력단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타 중대 인원들과 마주쳤다.
같은 막사를 사용하므로 얼굴이 서로 조금씩 익었기에,
역시 노골적인 부러움의 시선을 한껏 받았다.

전역날 공구시(09:00)
위병소를 통과했다.우리 소대의 김 모 병장이 위병조장 근무를 서고 있었다.
전역증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며,위병일지에 소계군성(소속,계급,군번,성명)과 시각등을 쓸 수 있도록 하였다.
며칠만 더 참아라고 했더니 ‘형,잘가요’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렇다.나는 이제 병장님이 아니라 형 이라는 단어가 익숙해져야 한다.

십이시(12:00)
그냥 집에 가자니 허전해서,이미 계획된대로 외박나온 후임들과 합류하기로 했다.
묵고 있는 여관에 가서 같이 TV를 보다가,나와서 삼겹살도 먹고,노래방도 갔다.

십오시(15:00)
이제 집에 돌아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금촌역으로 갔다.
후임들과 헤어지는 인사를 하고,나는 기차를 탔다.
화창한 오월이었지만,평소때와는 달리 무척 더웠다.
오월의 유난히 더웠던 어느날 입대했고,또 오월의 어느 무더운 날에 돌아가는구나.

십칠시 삼십분(17:30)
서울역에 도착했다.
휴가 나올때는 자유의 상징,휴가복귀할때는 답답함의 상징이던 곳이다.
수많은 인파들은 제각각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으며,
이제 나도 저 무리속의 일원이 된 것 같은 동질감이 느껴졌다.

서울역 앞에서
[▲서울역 앞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사이에서 즐기는 여유.이제 당신들과 나는 같은 무리요.민간인이라는…]

저녁 여섯시(06:00 PM)

저녁에 집에 도착했다.해가 늦게 지기 때문에 아직 밖은 훤했다.
내가 원하던 대로 해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집에 왔다는 거.

전역,제대.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경례
[▲집으로 돌아왔다.이 때의 기분은 ‘집떠나와 열차타고 훈련소로 가는날,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밖을 나설때’ 느꼈던 기분의 정반대이다.대문 안으로 돌아와 큰절대신 경례하던 요 짜릿한 기분…]

집으로 돌아와서 일단 군복부터 벗었다.날씨가 덥다.
진짜 군생활 끝난 건가? 믿기지 않았다.
그냥 휴가나온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전역한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군복무를 마친 자랑스련 예비역이다.오늘 밤 12시부로 신분이 바뀌는 몸이다.
더이상 집에 도착했다느니 행선지가 어디니 하면서 부대에 전화로 보고해 줄 필요도 없었고,
휴가 몇일 남았다고 괴로워 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그저 20년 넘게 살아왔던 방식대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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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요약]
2006-05-29 전역 1주년 기념으로 입대하던 날과 전역하던 날의 기억을 되새겨 보았으며,
그럴 때마다 따분하던 나의 현실이 갑자기 행복해짐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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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oughts on “입대하던날과 전역하던날의 기억

  1. 지구정복단

    시계는 내가 줬잖냐. 맘껏 흉터를 남겨오라고..음..참 나름데로 의미있는 일이었다.
    여하튼 나도 감회가 새롭군.

    Reply
  2. 안녕하세요

    군용시계에 관해 찾다가 우연찮게 들어왔네요

    정말 잘읽었습니다

    좀 늦었지만 저는 이번 4월에 군대가요

    걱정도 많고 긴장도 되지만

    시간이 해결해주겠죠

    Reply
  3. 이승에서의추억

    네,건강히 잘 다녀오세요.
    그리고 시간을 소중히 하세요.
    비록 지금은 안그럴지도 모르겠지만,나중에 돌이켜보면 전부 추억으로 남더군요.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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