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공포증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 및 경험담. 사진은 없음.

사실 환공포증이라는 주제로 오래 전부터 글을 써볼까 생각은 했지만, 글을 쓰기 위해 사진 검색하는 것이 두려워서 안쓰고 있다가 이제서야 쓴다. 이 주제에 관해 어떻게든 기록에 남겨놓고 싶었고,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나 관련 연구를 하려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환공포증을 가지고 있다. 사실 10년 전만 해도 공포증이라고 말할 필요도 없는 누구에게나 다 있는 당연한 증상인 줄 알았다. 하지만 ‘환공포증(Trypophobia)’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기고 인터넷에 사진들이 떠돌기 시작한 이후로 여러 사람들과 이 주제로 이야기도 해보고 사진도 보여주고 했는데 그러한 공포증이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훨씬 더 많았다. 그래서 그동안 내가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을 쭉 적어보려 한다.

환공포증 사진은 일반적인 불쾌한 사진과는 달리 그 특유의 징그러움이 있다.

환공포증에 대해 검색해보면 그 정도 사진은 누가 봐도 보기좋은 사진이 아니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오해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게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단순히 불쾌한 사진과는 다른 묘한 징그러움이 있다. 해당없는 사람은 애당초 이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길거리에 동물이 로드킬을 당해서 죽어있는 모습을 봤을 때는 누구나 끔찍해 할 것인데(물론 아닌 사람도 있을 것이다), 환공포증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특이한 징그러움이 있다. 이걸 말로 표현하기가 참 어렵다.

환공포증 증상은 매우 징그럽다는 느낌과 함께 주로 소름이 돋는다.

이것은 사람마다 증상이 다를 수도 있을텐데, 나의 경우 징그러워서 소름이 돋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몸이 가렵기도 한다. 심할 경우 며칠동안 계속 생각이 나는 경우도 있었다. 처음 연꽃소녀 사진을 봤을 때에는 너무 충격받아서 그 다음날 토익 시험 도중 계속 생각이 나서 시험에 방해가 된 적이 있었다. 귀신사진 처럼 보는 순간만 잠깐 놀라고 마는 사진이 있는 반면에 환공포증 사진은 증상이 꾸준히 더 오래간다는 특징이 있다.

환공포증은 선천적이다. 어쩌면 유전의 영향을 받는 것 같기도 하다.

어릴 때 여동생과 함께 만화책이나 텔레비전의 어떤 특정 장면이 대단히 징그럽다며 서로 소름끼쳐하며 이야기했던 적이 종종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이 환공포증의 일종이었는데 그 당시 1980년대에는 그것을 지칭하는 용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그 상황에서 같은 느낌을 갖는 줄 알고 있었다. 나중에 연꽃소녀가 개발된 이후로 부모님께 그 사진을 보여드렸는데 어머니는 대단히 징그러워 하신 반면 아버지는 별 반응이 없었다. 고로, 교육이나 환경의 영향은 아닌 것 같고 결국 선천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다.

환공포증은 전세계인에게서 발견된다. 심지어 Trypophobia라는 영어 단어도 있다.

XCOM2라는 게임이 있다. 게임 자체는 그냥 총이나 쏘며 건물 사이를 이동하는 평범한 게임인 것 같다. 그런데 이 게임의 표지 사진이 매우 징그러워서 스팀(Steam)에 올라왔을 때에 ‘관심없음(Not interested)’을 선택해서 다시는 화면에 안뜨게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얼마전에 플스 스토어에서 PSP 구독자에게 무료로 배포한 적이 있었는데 공짜에 낚여 실수로 받았다가 보유 타이틀 목록에 계속 뜨는 바람에 결국 후회하며 삭제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xcom2 trypophobia라고 검색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나처럼 그 포스터에 환공포증을 느꼈던 사람들이 구글에서 꽤 많이 검색되었다. 그리고 이미 위키피디아에는 환공포증이라는 단어가 여러 언어로 등재되어 있다. 전세계에서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공포증이라는 단어가 적절한 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증상’이라고는 말할 수 있다.

비둘기 공포증이나 벌레 공포증을 공포증이라고 한다면 충분히 공포증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자생적으로 발생한 신조어이다 보니 의학적인 정의는 아직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공포스럽다기 보다는 사실 불쾌하다는 느낌이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간지럽고 미칠 것 같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분명히 증상은 있고 전세계인들이 겪고 있으니 결국 어떻게든 연구가 진행될 것이고 용어가 정립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환공포증은 계속 보다 보면 적당히 면역이 된다.

처음 봤을 때 충격을 받았던 연꽃소녀는 지금 보면 그냥 ‘으, 역시 징그러워’ 정도의 수준이 되었다. 또한 처음 봤을 때 대단히 징그럽다고 생각했던 신논현역의 ‘어반하이브(Urban Hive)’라는 건물도 계속 보다 보니 이제는 살짝만 징그럽다는 생각이 든다. 고로 어느 정도 반응에 면역이 되는 것 같다. 물론 어디까지나 ‘적당히’다. 전혀 아무렇지도 않아진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술을 마시거나 피곤한 상황이면 환공포증도 역시 둔화된다.

결국 환공포증은 시각적인 감각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감각 자체가 둔해지면 불쾌함도 감소하게 되는 것 같다. 위의 계속노출 방식과 병행하면 환공포증 극복 방법이 될 수 있다. 어찌보면 알레르기 치료랑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환공포증은 맹독성 동물이나 전염병 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진화과정에서 생긴 방어기제라는 설명은 꽤나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사실 가장 비슷한 것이 천연두(smallpox)이다. 천연두 환자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환공포증의 가장 표준적인 사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시체 사진을 무서워 하고, 뱀과 같은 동물을 본능적으로 피하는 이유랑 비슷한 원리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공포증이 왜 본능적으로 탑재되어 있지 않는지는 의문이다. 관련분야의 학자들이 잘 연구해 주리라 믿는다.

아무튼 세상이 점점 발달하면서 그동안 인간이 인간 스스로에 대해 몰랐던 것들이 하나씩 밝혀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세상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이 세상은 엄청나게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때로는 그러한 다양함이 서로에 대한 몰이해로 나타날 때도 있다. 쓴맛을 많이 느끼는 유전자(TAS2R38)의 존재를 몰랐을 때에는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을 그냥 입맛이 까다롭다고 생각했듯이 말이다.

나는 늘 그렇듯이 평범한 다수에 속한 채 이 세상 그냥 적당히 묻어가고 싶은 사람이지만, 안타깝게도 환공포증은 다수가 아닌 소수에 속한 것 같다. 뭐, 어쩔 수 없다. 그냥 그려려니 하며 사는 수 밖에…

4 thoughts on “환공포증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 및 경험담. 사진은 없음.

  1. CJH

    어느정도 수준이 포비아 인지 모르겠다. 나도 찾아보니 징그럽긴 하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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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추 Post author

      그 정도의 느낌이면 환공포증 해당 안되는거.
      나도 비둘기 딱히 안좋아하지만 소름끼칠 정도는 아니거든. 그러면 비둘기 공포증이라고 할 수 없는거랑 비슷한 원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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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ijino

    저도 참 할 말이 많은 주제네요. 방탈출을 하다가 환공포증을 극대화시키는 아이템을 마주하고 소리를 질러 동행인들을 당황하게 하고 한 5분은 아무것도 못 했던 적도 있었죠… 물론 당시 그 아이템에 대한 거부감은 저에게만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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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추 Post author

      괴로운 사람은 괴로운데 해당 안되는 사람들은 잘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죠. 환공포증 뿐만 아니라 알코올, 카페인 같은 물질이나 고소 공포증, 물 공포증 같은 환경들도 사람마다 반응이 천차만별이라 결국 자신을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게 된다는 거.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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