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어쩌면 미국 하와이 및 호주에 각각 한달씩 머무를까 생각중이어서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이 야심한 시각에 ‘하와이 유심’과 ‘호주 유심’을 검색해 보았다. 아무래도 장기간 국외 여행이라 현지에서 안정적인 인터넷 연결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가격이 한달에 대략 4~6만원에 8GB~10GB 기본용량 제공에다가 용량 초과시 3G이하의 낮은 속도로 무제한 사용할 수 있어서 사실상 한국의 LTE요금제와 큰 차이는 없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마우스휠을 스크롤하며 네이버 검색화면을 읽어가던 찰나, 문득 한자가 가득한 뉴스기사를 보게 되었다.
제목은 濠洲紀行(호주기행) (十二(십이)). 무려 날짜가 1935년 3월 17일이다. 호기심에 당장 클릭했다. 비록 그때의 유심(留心)은 지금의 유심(USIM)이 아니지만, 호주(濠洲)는 지금의 호주(Australia)가 맞았다. 예전에도 ‘오스트레일리아’를 ‘호주’라고 했었구나. 필리핀의 옛이름인 ‘비율빈’처럼 더 이상 쓰이지 않는 이름도 있지만, ‘호주’나 ‘미국’처럼 지금도 여전히 널리 쓰이는 나라이름도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호주기행 12편은 적도를 지나는 내용이었는데 적도를 지날때 ‘적도제’라는 행사가 없어서 아쉬워하는 내용이었다. 다 읽고 나서 내친 김에 1편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동안 인터넷에서 각종 블로그를 비롯한 무수한 여행기를 봤지만 80년 전 1930년대의 호주 여행기라니 신박한 마음이 가득하였다.
‘호주기행’은 18편짜리 호주 여행기로서 1935년 3월 1일부터 3월 30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고 실제 여행은 1935년 1월 20일 일본 나가사키역(장기역,長崎驛)에서 시작하여 배를 타고 대만 해협을 지나 홍콩, 필리핀 마닐라, 다바오, 인도네시아 마나도, 호주 목요섬(Thursday Island), 뉴기니아, 호주 브리즈번, 시드니 등을 거쳐 약 한달 후인 2월 25일 호주 멜버른(멜본,Melbourne)에 도착하는 일정을 글로 썼다. 1930년대면 일제 시대인데 한자와 한글이 섞인 신문이라 읽는데 큰 불편함이 없었고, 게다가 지명도 지금 그대로 존재하는 지명들이었다. 아무튼 글쓴이는 ‘이중철’이라는 사람인데 본래 직업은 의사이고 전세계 여행을 꽤 다닌 전문 여행작가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행시에는 조선을 잘 모르는 서양인들을 위해 금강산 엽서를 준비하라는 깨알같은 여행팁도 있었다.
형, 생물이 그 환경에 순응하는 기전이야말로 놀랠만합니다. 첫날밤 같어서야 어떠케 근일개월의 항해를 계속하겟읍니까마는 대체로 이삼일간이면 누구나 배에 익숙해 진다고 합니다. 그러길래 승선후 이삼일간 항행이 조용할 사록 고생이 적은데 제(弟)는 승선후 곧 격랑을 만난 것이 적지 안흔 핸디캡이엿읍니다. 승선후 셋재날인 23일에는 바다도 다소 평온하려니와 휠신 배에 익숙된 듯 싶어 목욕도 할 수 잇고 식당에도 나가고 오후에는 처음으로 갑판휴게실에 올라갓읍니다 피아노, 축음기, 라디오, 바둑 기타 께임 도구등이 잇고 떽꼴푸는 일등갑판에만 한하엿읍니다 그 대신 이등선실은 뽐내는 손님이 없고 아모러케 지내도 무관한 점이 퍽 조핫읍니다. 예를 들면 식당에 갈 적에도 특별한 의복이 필요없고 아모 양복이나 걸치고 갈 수 잇는 것입니다 이날 오후에는 서양인 선객들 속에서 일대토론이 일어낫읍니다 – 1935년 3월 2일자 호주기행 2편 중에서
지금도 사용하는 핸디캡(handicap)이라는 단어도 씌여 있고, 덱골프(떽꼴푸,Deck Golf),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안 슬랭(오스추라리안슬냉,Australian Slang)이라는 단어도 사용되었다. 오호, 신문물과 신문명이 가득한 1930년대라…
저녁 후 우리 일동은 해안공원지대를 산보하엿습니다. 시원한 기풍을 가슴에 안고 봉미같이 느러진 야자수의 가지를 헤치며 남국의 잔디 우에를 걸어보니 실로 꿈속 같습니다. 공원 구석구석마다 남녀들이 앉어 끼타에 마추어 부르는 노래소리가 충분한 남국의 정서를 내 가슴에 담어주고도 남엇습니다. 이곳은 농촌에를 가더래도 다 허무러저가는 움집 속에서도 꼭같은 흥취의 멜로디가 흘러나온다고 합니다. 이날밤 10시에 배는 다시 다바오로 향하엿습니다 – 1935년 3월 9일자 호주기행 8편 중에서
홍콩에서 하루 머문 후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해서 있었던 여행기다. 홍콩 여행기도 재미있었지만 필리핀 여행기도 멋지다. 야자수의 가지를 헤치며 남국의 잔디위를 걸으며 공원의 남녀들이 기타에 맞춰 노래를 부르다니, 그것도 1935년에… 지금 2017년에 똑같이 그렇게 해도 꿈같지 아니할 수가 없을 터이다.
갑판이 좀 부적당하지만 떽꼴프도 하여보고 쓸데없는 토론도 하여봅니다. 원래 구재없고 지극히 서투른 영어에 결코 대전이 못되나 그네들이 인종문제에 가서 우리의 생각과 너무도 엄청나게 틀리는데 놀라지 안을 수 없습니다. 현재 서양이 가지고 잇는 찬란한 문화를 우리가 지금 모방하고 잇는 것이 사실인 만큼 선진과 후진의 차는 잇을 망정 우리가 그네들의 신을 신고 그네들의 의복을 입고 그네들의 모자를 쓴다고 원숭이가 사람의 숭내를 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우월감을 가지고 잇는 것이 하도 분하여 그 중 한사람을 붓들고 하로 종일 말다툼을 하엿습니다. 하고나니 별소득도 없고 기분만 불쾌하여 일즉 자리에 누웟노라니까 이 자가 찾어와서 자기는 농담으로 시작한 것이 감정전까지 되엇으니 서로 악수하고 고만두자고 하여 그리햇습니다마는 몇일 간 좀 침울한 생각에 지냇습니다. – 1935년 3월 14일자 호주기행 9편 중에서
하지만 여행중 유쾌한 기억만 있지는 않았다. 배위에서 인종차별 이야기가 나와서 다퉜다는 이야기도 있고, 뉴기니아 여행중에는 남녀차별과 일부일처제 이야기도 나온다.
일부다처제도 하에서는 여자의 권리라고는 거의 찾어볼 수 없으리만침 가축이나 물화를 소유하고 꼭같은 인식을 가지고 잇엇기 때문에 과부에게는 그러한 귀결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악습은 어느 한 지방의 폐습으로 볼 것이 아니라 우리 인류의 결혼제도가 극히 원시적인 동가족결혼제도에서부터 현금의 일부일처제도까지 이르는 그 중간의 한 유풍으로 보는 것이 가장 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논점에서 고찰할진대 우리나라에서 과부가 자기의사여하에 불구하고 수절을 해야 되는 것도 유교의 도훈 아래에서 빚어낸 미덕만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1935년 3월 19일자 호주기행 13편 중에서
글의 내용을 보아하니 꽤나 지식도 풍부한 것 같고 견문도 넓은 듯 하다. 1930년대에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계층이라면 제법 부유층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한가지 이상한 감상은 거리에 비교적 만흔 사람들이 보도에 서서 잇거나 뻴취에 앉어 잇습니다. 물론 너무 더우니까 그러키도 하겟지만 그 중에 실직자들이 상당히 섞여잇는 듯 싶엇습니다. 현재 호주 전토에 실업자 기 30만 가량 된다는데 정부에서 일주에 2,3일간 어떤 일을 시키든지 그러치 안흐면 최저한도의 생활비는 급여하니까 굶지는 안치만 원체 생활정도가 높은 상등 거지라 처치하기가 아마 꽤 힘들 듯 싶습니다. -1935년 3월 27일자 호주기행 15편 중에서
드디어 호주에 도착했다. 필자는 호주의 높은 실업률을 걱정하고 있었다. 실업자 문제는 1935년이나 2017년이나 역시 문제다. 1930년대는 대공황의 여파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호주 역시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 읽고 나서 글쓴이 이중철(李重澈)에 대해 다른 글이 없나 호기심이 생겨 찾아보았는데, 알고보니 대한민국 최초의 정신과 의사였다. 한자 이름도 같고, 여행기 마지막 부분에 정신병원을 방문한 것도 그렇고 호주 선교사가 교육했다는 내용도 그렇고, 시기도 일치했다. 좀 더 찾아보니 정확한 내용을 기술한 신문기사도 발견했다. 그렇다. 알고 보니 역사적인 한획을 그으신 분이셨다. 하지만 다른 여행기는 없는 것인지 내가 못찾은 것인지 아쉽게도 발견하지 못했다.
아무튼 1930년대의 여행기에 빠지다 보니 어느 덧 날이 밝아온다. 설날 연휴 첫날을 이렇게 보내는구나. 호주 유심(USIM)때문에 간만에 뜻하지 않게 시간여행 제대로 했다. 하지만 어떤 회사의 유심을 살 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어차피 호주행은 10월 11일쯤 될 예정이니 천천히 생각하기로 했다.